친구 이야기
우리 친구 소식입니다,,
문학하는 친구죠,,,
그것도 부산대 상대 경제과 출신이면서,,
고성의 산동네 초라한 촌농에 조용히 살면서 이번에 산문집 한권을 출간 했네요,,
동길산 입니다,,
오다가다 서점 들러 한권씩 사서 보세요,,^^
그리고 축하해주시구요~~
내용들을 보시면
소중한친구임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오늘은 국제신문 문화면에,,
내일자로 부산일보 문화면에 보세요,,^^
글 내용중에 내 이름 석자도 넣어져 있네요,,,
책내용중 일부,,
창원 주남저수지 둑길
둑길이다. 비에 젖은 둑길이다. 비가 내는 소리에 젖은 둑길이다. 비에 젖은 제비꽃이 보인다. 비가 내는 소리에 젖은 제비꽃이 보인다. 비에 젖은 둑길이 제비꽃이 사람 발목을 붙잡는다. 비가 내는 소리에 젖은 둑길이 제비꽃이 사람 마음을 붙잡는다.
둑길은 불안하다. 발목을 붙잡고 마음을 붙잡는 둑길은 불안하다. 움직이는 것도 불안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불안하다. 둑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인가. 옆으로 내려가는 길인가 가만히 바라보는 길인가.
주남저수지 둑길. 내로라하는 저수지답게 둑길, 길쭉하다. 아득하다. 아득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 발걸음으로 둑길의 끝에 가 닿을지 싶다. 사람은 많아 봤자 아홉 명 열 명. 누구는 젖은 담배를 태우고 누구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민다.
둑길 이쪽은 산에서 강에서 흘러든 물, 저 쪽은 그 물을 받아내는 논. 둑길은 물과 논의 경계다. 물과 뭍의 경계다. 물과 뭍이 맞닥뜨리는 경계가 둑길이다. 둑길에 이르러 물은 멈추고 둑길에 이르러 뭍은 시작된다.
멈춤과 시작이 맞물린 둑길. 둑길에 와서 멈춤을 보고 둑길에 와서 시작을 본다. 멈춘 새를 보고 멈추었다가 날아가는 새를 본다. 시든 갈대를 보고 시든 갈대 아래에서 돋아나는 새순을 본다.
비에 젖은 둑길, 붉다. 황토다. 흙을 집어 손가락으로 비벼본다. 보드랍다. 보드라운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손바닥을 털고 비가 그친 하늘을 본다. 새가 두 마리 세 마리, 둑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간다. 둑길에서 멀찍이 떨어진 논에 내려앉아 바닥에다 부리를 비벼댄다.
둑길은 경계다. 그러면서 길이다. 둑길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이면서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길이다. 둑길이 있기에 물은 모이고 둑길이 있기에 논은 바닥을 적신다. 어쩌면 둑길은, 경계라기보다는 길이다. 이쪽과 저쪽이 소통하는 통로다.
이쪽과 저쪽. 둑길은 이쪽과 저쪽이 하나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따로 있어도 따로 있는 게 아님을 보여주고 달라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쪽과 저쪽 그 중간에 단지 문이 있을 따름이고 그 문은 굳게 닫힌 막무가내의 문이 아니라 언제든지 열리는 상생의 문임을 보여준다.
상생은 화해다. 상생은 화해를 거쳐서 얻어진다. 다른 서로가 다른 서로를 받아들이는 게 화해이고 다른 서로가 다른 서로를 적시는 게 상생이다.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 적시는 것, 그것이 화해이다. 그것이 상생이다. 하루하루가 지금보다 막막하던 몇 년 전. 그래도 봄날은 온다는 심정으로 쓴 시가 ‘춘분’이다.
‘밤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입니다 길던 밤이 내일부터 양보하겠다며 낮과 화해하는 날입니다 해 질 무렵 못둑에 앉아 화해 술상을 차립니다 내 생애의 밤과 낮도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밤이 양보해 낮이 못둑처럼 길어지기를 바랍니다.’
둑길에 앉아서 본다. 내가 멈춘 날들. 멈추어야 하던 날들. 움직이는 것도 불안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불안하던 날들. 걸어온 날들은 보잘것없고 사람 발걸음으로 가 닿을지 싶던 걸어갈 날들. 둑길에 이르러 멈춘 물 같은 날들.
둑길에 이르러 멈춘 물 같은 날들. 막막하던 날들.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이다. 두 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날들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날들이다. 지금의 내가 좋든 싫든 나를 있게 한 날들이다. 이런 날이 있으면 저런 날도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한 날들이고 좋다고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고 안 좋다고 마냥 안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게 한 날들이다. 나를 나이 들게 한 날들이다.
내로라하는 저수지답게 둑길 역사는 길다. 길쭉한 둑길만큼이나 길쭉하다. 원래 늪이던 여기에 둑길이 들어서고 저수지가 들어선 건 삼일독립운동 다음해. 넘치는 물을 제대로 가두려고 쌓은 둑길이 주남저수지 둑길이다. 저수지 저쪽 창원 동읍과 대산면 너른 논에 물을 제대로 대려고 만든 저수지가 주남저수지다.
농자가 천하지대본이던 이삼 세대 전만 하더라도 물을 가두고 대는 일 치수야말로 농사의 대본이다. 천하의 대본이다. 물이 넘치면 물이 모자라면 농사가 무너지고 천하가 무너진다. 그러기에 저수지는 더욱 깊게 보이고 저수지 둑길은 더욱 높게 보인다. 물을 가두고 대는 일, 깊고 높게 보인다.
가두고 대는 일은 가두고 놓아주는 일은 따지고 보면 전혀 다른 일이다. 극과 극이다. 전혀 다른 상극이 둑길을 가운데 두고 공존하고 있다. 둑길은 극과 극이 같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같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상극이 상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전혀 다른 나와 전혀 다른 네가 사실은 같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너와 내가 우리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서 둑길은 내 속에 나를 가두는 일도 내 속의 나를 놓아주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가둬야 놓아지는 정리를 보여주고 가둔 만큼 놓아지는 순리를 보여준다. 찰랑이는 물살에 부대껴 가며 보여준다. 둑길을 보고 있으면 둑길에 서 있으면 나를 멈추게 한 날들만큼 나를 놓아줄 날들도 있지 않나 싶다. 나를 가둔 날들만큼 논바닥을 적시게 할 날들이 언젠가는 있지 않나 싶다.
사진을 찍는 일행에게 다가간다. 동창 이후근이 사진기를 보여준다. 디카라서 좀 전에 찍은 장면을 재생한다. 맨눈으로 보는 것 하고 화면으로 보는 것 하고는 딴판이다. “사진은 결국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다시 보는 거라고 생각해. 다르게 말하면 사물을 다시 해석하는 거지. 빛과 그림자도 적절하게 볼 줄 알아야 하고.”
덧붙여 말한다.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모든 사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둑길 이쪽 저수지를 새삼 둘러보고 저쪽 논을 새삼 둘러본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이쪽도 빛과 그림자이고 저쪽도 빛과 그림자이다. 빛과 그림자가 같이 있다. 희미하면 희미한 대로 짙으면 짙은 대로 빛과 그림자가 맞대어 있다. 상극이 맞대어 있으면서 저수지가 있게 하고 논이 있게 한다. 사물이 온전히 있게 한다.
해가 난다. 종일 온다던 비가 그치고 해가 난다. 아홉 명인가 열 명인가 하던 사람이 늘어나서 둑길이 북적댄다. 우산을 든 사람 대신에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간다. 둑길 저쪽에서 둑길 이쪽으로 새 두 마리 세 마리, 날아온다. 유모차에 탄 아이가 날아오는 새를 보고서 “새! 새!” 손짓한다.
비도 그친 김에 둑길 끝까지 가 볼 작정으로 걸어간다. 만만하게 볼 거리는 아니지만 작정하고 가면 못 갈 거리도 아니다. 둑길 제비꽃에 맺힌 방울방울 빗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제비꽃을 손가락으로 퉁기면 빗방울이 둑길 너머 찻길 너머 논에까지 퉁겨나갈 것만 같다. 논바닥까지 다 반짝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