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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나 어린시절

by kike4989 2020. 5. 14.

나 어린 시절 70년대 초 

시골 작은마을에는 친척들과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 가끔 있었다

일본에서 1년에 한두번씩 작은 할아버지 오시는 날이다

이날이면 안방에는 큰 보따리 몇개가 풀어지고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둘러앉아 있으면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생활용품,라디오. 비누. 분 화장품. 그외 많은 옷들을 가족 친지분들께 나누어 주신다

동네 사람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구경 하곤 했었다

이때면 내 어깨가 으쓱해 있곤 했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해방전 가난한 조국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가셨다

장손이던 아버지를 일본으로 데려가 초등 공부를 시켜시고 

젊은 청춘을 바쳐 갖은일을 다해서 모은 돈으로 고향 형제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을 드리기 위해 무겁고 귀한 물건들을 갖고 오시는 날이었다

전기도 없고 텔레비젼도 없는 시절, 건전지 넣어 사용하는 라디오가 유일한 바깥 세계를 들을 수 있었는데
신세계 이야기를 작은 할아버지가 오시면 보따리와 함께 일본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우리집 아랫방에서는 할아버지께서 늘 춘향전을 읊조리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랐으며
소 죽 끓여 먹여 십리길 먼지 뽀얗게 날리던 비포장 신작로 길을 걸어 읍내 장터에 내다 팔아 소득을 올리던 시절 이었는데,
일본 길거리에는 멀쩡한 자건거랑 전자 제품들이 길거리에 고물로 나와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셨다

어린 나는 작은 할아버지를 통해 이렇게 일본을 알게 되었다

 

산업이 발전 해가던 일본에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시기였고 

우리나라는 6 25이후 뒷산은 민둥산 이었고 농삿일은 관개시설(灌槪施設)이 없어 가뭄과 홍수가 잦아 큰 수입이 될 수 없었다

일본에서 한달 벌이는 우리나라 일년 농삿일보다 더 벌수가 있었다

이웃집 여러 아저씨들이 일본 같이 갈수 있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부탁들을 하셨지만 보증인이 없어 갈수가 없던 시절 이었다 
 일본행은 시골에서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었었다.

아버지께서는 작은 할아버지의 초청장및 일본에서 보내온 서류를 우편으로 받으시고 일본 대사관 비자 신청을 하면 서울 관청( 대사관. 외교부. 중앙정보부 인지?)에 가셔서 반공 교육을 받고 일본을 가실수가 있었다

 조총련과 거류민단이 일본에서는 양분되어 있었고 일본에서는 북한쪽 조총련이 경제력,영향력이 컷던 시절이라 자칫 일본내의 조총련계의 꼬임에 넘어가 월북등 잘못 될수도 있었다고 했다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하수구 맨홀 교체. 건축노동일. 제조 시설에서의 제조업등을 노동(노가다) 일을 하셨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신 아버지는 그나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함께 일하던 일본 노동자들은 일을 해도 정확하고. 완벽하게 하며 남에게 피해주는 것은 절대로 있을수가 없으며 사회에서 규정으로 정해진 것은 개인이 희생해서라도 사회가 우선 이라고 어린 나에게 자주 들려 주시곤 하셨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통해서도 일본을 알게 되었다 

 

 

 

2018년 11월 26일 5형제 모임때.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일본 다니시면서 8남매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어린 나에게

나쁜 일본보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선진 사회의 물건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좋은 일본이 더 가까워 졌다

 

중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경주 쪽으로 가게 되면 가끔 일본 관광객들을 볼 수가 있었고

쪼로록 뒤에 따라가서 아버지로 부터 배운 일본 인사말을 몇 마디 해서 일본인들을 웃게 만들기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가면서 일본어를 틈틈이 독학하게 되었고 취업을 일본 기술 투자및 기술 제휴를 받은 농기계 회사에 하게 되었다.

일본인 고문과 기술자들이 생산 기술 지도를 하였으며 일본 도면으로 일본 기계들로 농기계 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없던 수치제어 NC 기계들이 무인으로 가공작업을 하고 있었고 공장 자동화 라인 도입에 일본인들과 소통의 기회가 많아졌다

그래서 사내 젊은 직원들이 모여 일본어 스타디그룹을 만들어서 학원도 다니며 저녁시간에 모여 일본 생산, 설계, 기술교육, 습득을 위해 일본 출장 다녀온 직원들로부터 일본 이야기들을 자주 듣게 되었다.

 

출근길에 일본제 자동차가 바로 뒤에 따라 붙어도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놀랬고 일본인 고문은 클락션은 절대 울리지 않아서 또한번 놀랬으며 한참 걷다가 알아채고 놀라 비켜주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일본과는 멀어졌다

94년 개인 사업 시작하고

98년 IMF를 겪게 되고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13년만에 일본과의 인연이 연결되는 계기가 왔다

 

우리나라 OECD 가입 등으로 2000년도부터 일본제 중고 기계류가 수입 허용되면서

생애 최초 2001년 친구에게 부탁해서 함께 일본 가게 되었고  유휴(遊休) 중고 기계류를 사용해 보던 업체들이 금속 재질. 내구성과 정밀도에서 띄어나 입소문으로 점점 많이 소요되었다.

그때부터 비자를 받아 일본을 오가며 13년만에 현지에서 일본어를 사용해 볼수가 있었다

 

 

2005년 일본 출장길에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일본과 가까웠던 나로서는 남들보다 비지니스가 쉬운  편이었지만 도시락으로 배를 체워야 했고 싼 호텔을 찾아다니면서 일본 출장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신뢰를 쌓았다

 

지금도 태풍이 오거나 재해가 나면 일본에서 염려와 안부의 전화가 먼저 오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거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30년대에는 작은 할아버지께서.

산업화 이전 70년대에는 아버지께서.

2000년도부터는 내가.

 

이웃나라 일본과 끊을수 없었던 인연으로 사업을 영위해 올수 있었으며 그 수입으로 가장으로 한 가정을 이룰수가 있었고,
서로 좋아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그들과 더 친하고 싶다

 

2020년 5월 13일

 

이후근.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폐해는 풍요의 불평등한 분배이고, 사회주의의 태생적 미덕은 가난의 평등한 분배다.
The inherent vice of capitalism is the unequal sharing of blessings. The inherent virtue of socialism is the equal sharing of misery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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